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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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체육시간에는 높이뛰기라는 종목이 있었다. 형들은 체육점수를 잘 받기 위해 집에서 나무틀을 만들어 놓고는 뛰는 연습을 하였다. 어느 날 혼자 있을 때 높이뛰기 연습이 하고 싶어졌고 형들이 사용하던 틀들을 놓고는 순간적으로 슈퍼맨처럼 날면 높이 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힘껏 날았을까? 그러나 넘어지면서 왼쪽 팔이 부러졌고 팔이 뒤틀려 퉁퉁 부어 올랐다. 아차 큰일났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상점 하나 없었던 시골동네에 의료시설은 없었고 어머니는 팔이 아파 꼼짝 못하는 나를 업고 앞 동네에 부러진 뼈를 잘 만진다는 무허가 의사를 찾아갔다. 어머니의 등위에 있는 나를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다 큰 놈이 어머니 등에 업혔다고 놀렸다. 아프기도 창피하기도 하여 어머니의 등속에 얼굴을 숨겼다.

 

의사는 나를 바로 눕게 하고는 내 팔을 힘껏 덜컥 소리가 나게 몇 번 잡아 당겼다 놓았다. 소리 들었죠? 그러면서 뼈가 잘 맞춰 졌다고 했다. 물론 난 까무러치게 아파서 울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고 어머니는 뼈가 잘 굳는 데 좋다는 밤을 갈아 부러진 팔 위에 싸매 주셨다.

 

그렇게 저렇게 한달이 지나갔다. 그런데 누가 내 팔 모양이 이상하다고 했고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봐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어머니와 제주시내에 있는 접골병원에 가게 되었다. 아마 이름이 대한접골원이었던 것 같다.

 

처음 간 제주 시내의 신기한 풍경은 잠깐이었고 두려운 병원에 다시 들어섰다. x레이라는 걸 찍었으며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내 팔의 뼈가 잘못 맞춰져 그대로 굳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이 사실을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다.

 

의사양반은 내 몸 위에 올라 앉더니 나머지 두 사람에게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으라고 했다. 뭔가 겁나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병원 보조 두 사람이 각각 나의 오른팔과 어깨를 붙잡았다. 의사선생은 결국 내 팔을 다시 부러뜨리고 어긋난 뼈를 맞추는 치료를 진행해야 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고통을 잊지 못할 만큼 끔찍한 형벌적 치료였다. 하지만 더 시간을 늦췄다면 팔이 완전히 굳어 치료 자체가 불가했기에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한 일이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엔 깁스를 푸는 과정이 있었고 기억 자로 굳은 팔을 강제로 펴는 재활 치료 과정을 몇 번 더 거친 후 드디어 내 팔은 완전해졌다.

 

세월이 흘렀다. 슈퍼맨처럼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난 이제 불혹을 넘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걸음이 불편해진 어머니…… 몇 해전부터 어머니의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한 달에 한번 치료를 받아왔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 마음이 아파 병원 의사의 처방대로만 한다면 좋아질 거라 스스로 위안도 삼고 어머니께도 위로를 드리곤 했다.

 

언젠가 차에서 내려 지팡이를 집고 동행을 할 때 계단에서 잠깐 업어 드리려 했지만 극구 사양을 하셨다. 어머니는 걷지 못해 업힌다는 사실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셨다.

 

그렇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무릎은 점점 많이 불편해졌고 언제부터는 이젠 공항에서 휠체어 서비스가 아니면 거동하기가 힘들 정도로 불편해 지셨다. 처음 휠체어를 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머니가 고향집 앞에서 아버지와 경운기를 타고 가시다 작년 말 큰 사고를 당하셨다. 뒤에서 오던 승용차가 부모님의 경운기를 앞지르려 했고 승용차는 마주 오는 차를 발견하고는 부모님의 경운기를 친 것이었다.

 

난 서울에서 동료들과 이른 술 한잔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7시쯤 갑자기 고향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가 물었다. 혹시 아느냐고? 뭘? 고향집 앞에서 사고가 났는데 두 분이 크게 다치셨고 특히 어머니가 많이 다친 것 같다고……  순간 멍했다. 고향 형제들에게 연락 온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소식을 들을 정도면 소문 날 정도로 정말 큰 일이 벌어졌구나.. 정신 없이 고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가슴 쪽에 많이 다치었고 어머니는 온 몸이 부서질 정도로 다쳤다. 정황상 아버지의 그 정도 상처는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차가 덮친 후 그 밑에 깔려 혼절했다. 반대편에 나가 떨어진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돌아가셨다고 생각을 했고 움직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두 분 다 정신이 온전하게 깨어 있으셨다. 하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어머니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어머니의 상처는 척추 쪽을 수술하지 않으면 마비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제주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어머니는 서울의 아산병원으로 이송되어 대수술이 이뤄졌다. 진짜 두려움…… 속으로 누구에겐가 어머니가 무사하길 많이 빌었다. 노령에 수술을 견디어야 하는 불안함을 갖고 있었던 수술은 다행히 잘 진행되었다. 수술 후 온 몸에 각종 호수와 호흡기를 맨 체 자식을 알아볼 수 없는 처절한 어머니의 모습은 한동안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휠체어든 뭐든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좋겠다는 생각. 왠지 모를 죄스러움. 그런 게 내 마음을 뒤엎었다.

 

서울에서 어머니가 수술 후 한 달이 지나가는 동안 고향엔 형제들이 있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었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치료가 진행되어 나아진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셨고 수술 시에도 못 깨어 날까봐 무척이나 걱정하셨다. 그러다가 한달 후 제주에서 뵌 아버지의 모습은 다시 한번 내 가슴을 철렁 아프게 했다. 한두 달 사이에 너무 수척해지시고 늙으신 아버지의 모습...... 83세의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떨어져 혼자 병원에서 걱정으로 식사도 잠도 제대로 못 이루셨던 것이다.

 

그 후 다행히도 회복된 어머니의 제주 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활병원으로 함께 옮겨 앞 뒤 병실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한 숨 내려 놓아 지금은 많이 호전되셨다. 작년 깜짝 놀랄 사고 소식을 10월에 접하고 11월 수술 후 이제 6개월이 되어간다. 어머니는 그 동안 수술 결과 확인을 위해 두 번 서울아산병원을 다녀갔다.

 

의사가 어머니의 경과가 좋다고 했고 외견상으로도 많이 좋아지셨다. 지팡이와 휠체어에 의지하시는 어머니를 뵐 때면 어릴 적 나를 업고 병원으로 내달렸던 어머니의 모습이 파노라마 된다.

 

부디 건강 하시기만을......

 

- by 메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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