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정보'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1.04.18 권리를 보호 받으려면 투표하십시요 (1)
  2. 2010.11.25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3. 2010.09.30 우리집 담장에 열린 쌍호박
  4. 2010.08.27 역사상 가장 아름답게 세상을 바꾸는 민란
  5. 2010.04.10 꽃한송이, 별빛.., 내게 당신은 (1)
  6. 2009.07.04 김대중 대통령의 노무현 추도사 전문
  7. 2008.08.18 생전 고 정몽헌회장의 슬픈 인터뷰 중
  8. 2008.08.16 임종국의 '성공한 실패'
  9. 2008.07.01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시국미사 성명전문 (1)
  10. 2008.06.21 함부로 인연을 맺지마라

권리를 보호 받으려면 투표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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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ucker.tistory.com 하늘봐 2011.05.11 01:4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현 상황을 저지할 수 있는 권리.
    저는 그래서 앞으로 투표라면 신경쓰고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치 상황을 보면 열받고 머리아프지만...기본은 하려고요. ^^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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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담장에 열린 쌍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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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꼭지에 두개.. 이렇게 열리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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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아름답게 세상을 바꾸는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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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민란에 동참합니다.
야권단일정당을 만들어 내고 2012년 반드시 민주 정부를 세워 냅시다.
 더 이상 한탄해 하며 정치인에게 혹시나 하고 기대지 맙시다.
우리의 함성으로 거부할 수 없는 명분으로
 국민의 명령을 이행하게 합시다.


http://www.powertothepeopl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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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한송이, 별빛.., 내게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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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송이- 김용택님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꽃 한 송이



별 빛 / 김용택

당신 생각으로
당신이 내 마음에 가득 차야
하늘에 별들이
저렇게 빛난다는 것을
당신 없는 지금,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그대, 거침없는 사랑 / 김용택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늘 보고 싶어요 / 김용택

오늘
가을산과 들녘과 물을 보고 왔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 지나고
작은 개울들 건널 때
당신 생각 간절했습니다

 

참 좋은 당신 - 김용택님

어느 봄 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해도
참.좋.은.당.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 김용택님

당신...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당신...

 

빗장 - 김용택님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내게 당신은 - 김용택님

사랑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요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내 사랑을 이끌어낼 사람
어디 있을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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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ucker.tistory.com 하늘봐 2010.04.22 00:4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겨울 꽁꽁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봄과같이 그렇게 설레이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 만나면 참 포근하고 따뜻할 것만 같습니다. ^^

김대중 대통령의 노무현 추도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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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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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고 정몽헌회장의 슬픈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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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2003/07/01자 인터뷰 중


“개성고도 500만평, 그리고 공업단지 800만평, 신도시 700만평, 총 2천만평에 이르는 지역을 50년간 특별구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이 2천만평이 개발되는 8년후면 입주기업이 2,000업체, 장래인구가 45만명, 고용인구가 25만명, 연간 150억불의 매출이 보장될 것입니다.”

남북화해의 꿈을 꾸준히 실현시켜온 정몽헌회장, 너무도 기뻐해야 할 이 순간이건만 그의 얼굴에는 시달린 세파의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우리나라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동분쟁, 남북긴장 이 두 가지로 요약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금강산사업을 하고있는 5년 동안 아무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30년간의 외국인 투자액보다 이 5년 동안의 투자액이 더 많습니다. 자꾸 남북경협을 이야기하면 남쪽사람들은 일방적인 퍼주기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북측을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북측으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자신의 문제를 타개하는 출로로서 호상적 보완의 협력을 하는 것이지요. 노동력이 사회보험료 30%를 포함해서 65불선입니다. 월기준임금이 50불밖에 되지 않습니다. 중국이나 베트남보다도 경쟁력있는 최저수준입니다. 그리고 기업소득세가 14%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28%, 홍콩이 16%, 심천이 15%인 것과 비교해서 최저수준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사유지가 없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인 플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요. 남한에서는 공사비보다는 보상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지요.”

―그렇다고 우리나라에도 마산·창원 등 많은 공단이 비어있는 실정인데 과연 개성공단이 물리적 조건만을 갖춘다고 해서 생각대로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될까요?

“88올림픽 이후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중소제조업체가 8,000여개나 됩니다. 일본도 64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플랜트가 외국으로 빠져나갔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중국도 200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노동시장의 변화가 온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이제는 슬슬 중국을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습니다. 중국내륙이나 캄보디아, 베트남으로 옮길 구상을 하고 있는 것이죠. 무엇때문에 우리투자자들이 풍토, 습관, 언어가 다른 곳에서 그렇게 고생을 해야만 합니까? 컨테이너 한 박스에 인천에서 청도까지 600불, 부자재를 나르고 제품을 가져오고 하는데 왔다갔다 1,200불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이런 물류사정은 점점 악화될 뿐이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동집약적인 가공업공장을 외국에 뺏기다 보면 결국 우리나라의 소재산업도 다 빼앗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결국 산업공동화가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죠. 개성공단은 이러한 우리사회의 산업공동화를 막고, 조선반도내에 동북아 물류중심지를 만들며, 남북경제협력의 거점을 개발함으로써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체계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남북이 긴장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첩경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동포를 도와줌으로써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핵문제의 선결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로 우리나라 정부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결국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서 뭔 소득이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현 북한체제의 보장입니다. 그러나 선포기·선인정의 끝없는 술레잡기는 의미없는 말장난입니다. 결국은 핵포기와 동시에 체제인정이 이루어지는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문제해결방식에 있어서 미국내에 있어서도 국방부와 국무부의 견해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파월 국무장관은 절대 북한이 핵무기를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그것은 일본이나 남한이나 대만에게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명분을 줄 뿐이며, 한반도의 긴장의 고조는 궁극적으로 아무에게도 실리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합리적 사고가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중국의 지도부가 바로 이러한 입장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위시한 매파들은 오히려 북한이 핵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용인하고 수출만 못하게 하여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켜 그것을 빌미삼아 MD를 구축하고 중국을 고립시키자는 것이죠. 우리는 파월과 중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로부터 결국 가장 크게 피해를 볼 사람은 우리 남한입니다. 따라서 남한을 도외시한 어떠한 협상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안일한 태도가 미국 매파만 도와주고 4조 9천억원의 국방비 증가만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참여도 못하고 경제적 부담만 떠안는 그런 바보짓은 더이상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남북경협은 핵문제와는 별도로 진행되어야 하는 우리민족 공생의 당위입니다. 핵문제가 해결되어야 경협이 이루어진다는 사고는 안일무사주의적인 나태를 의미할 뿐입니다. 주변여건이 나쁠때 일수록 오히려 우리는 긍정적 사고를 해야 합니다. 기회는 타이밍입니다. 핵문제해결 운운하면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유리한 모든 타이밍은 사라질 뿐이죠.”

―북한당국은 남북경협사업을 정말 진지하고 성실한 열의를 가지고 추진하려하고 있습니까?

“제가 김정일위원장을 만났을 때 누가 새로 지정한 특구의 70∼80%가 논밭이므로, 공단부지로 되기 위해서는 지목변경을 해야할텐데 괜찮겠습니까하고 물으니까 금방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개성공단 잘되서 쌀을 사먹으면 되지 하구요. 이것은 북한지도부의 개성공단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중요한 언급입니다. 즉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인민의 삶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입장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도부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주의체제가 매우 비효율적이며 인센티브가 부족하다는 것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병폐는 거저 놀고 먹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김위원장이 항상 말해요.

그리고 김위원장은 새로 개발되는 개성공단은 미국의 도시계획이나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서슴치 않고 배우겠다고 공언해요. 주체사상의 창조성도 좋으나 타인으로부터 좋은 것을 배우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미국은 유럽의 장·단점을 이미 안 후에 개발한 시스템임으로 훌륭한 점이 많을 것이다라고 아주 미국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얘기해요. 아참 그리고 이런말을 하더군요. 미국이 강국이 된 것은 결국 사람정책을 잘 썼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정책이란 이민정책을 말하는 것이죠. 외국이민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했으며 그들이 미국땅에서 흘리는 땀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보람을 주었다. 그래서 예술가, 과학자, 스포츠맨이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하더군요. 북한은 자본주의의 경험이 부족하다. 함부로 나서면 안된다. 남한기업가들에게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남한기업가들은 북한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그 효율적인 첩경을 잘 지도해주어야 한다고 말에요.”

―북한은 언제부터 왜 그렇게 시급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요?

“김정일위원장이 긴박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역시 2000년도에 상해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충격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지도부사람들이, 심천이 홍콩이라는 대도시를 끼었기 때문에 발전한 것처럼, 특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울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김위원장에게 귀뜸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현대아산은 해주까지는 생각을 했어도 고려 500년의 수도 개성을 내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최적의 특구가 확보된 셈이죠. 개성은 서울서 한시간밖에 안걸려요. 경기도 이천 정도의 거리밖에는 안되요. 어떤 때는 서울 강북에서 강남다녀오는 것보다 더 수월할 수도 있어요. 그것은 서울의 한 익스텐션에 불과한 셈이죠. 생각해보세요.

북한이 일년에 모자라는 쌀이 200∼300만톤인데 이게 5억불정도에요. 그런데 개성공단에서 150억불의 생산까지 기대안해도 우선 50억불만 생산한다해도 식량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죠. 빌어먹지 않고 당당히 살 수 있는데 왜 그런 길을 택하지 않겠어요? 개성공단이 가동이 되면 이미 북한사회는 되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역사의 진로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나라가 군비를 축소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새로운 경제적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은 우리민족의 평화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어요. 정회장 당신은 바보같은 장사만 하고 있다. 장사꾼이 당장 돈벌리는 일은 않고 의리믿고 투자만 하고 있다. 그러다 망하면 어떻헐꺼냐?

“글쎄요. 저는 본시 바보같은 사람인가봐요. 그러나 이 세상에 의리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장사는 결국 신용입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내가 북한을 믿고 거래를 시작했다고 한다면 나는 신용을 끝까지 지켜야하고 북한 또한 끝까지 신용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남한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을 너무 이해못해요. 북한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은 꼭 지킵니다. 그들은 신용을 생명처럼 중요하게 생각해요. 닳아빠진 사람들이 아니에요. 나는 바보같이 의리믿고 장사를 할 겁니다. 저는 결국 장사꾼입니다. 1년에 버느냐, 2년에 버느냐, 10년에 버느냐? 결국 이런 문제일 뿐이죠. 우리 아버지는 미포만 항공 흑백사진 하나만 달랑들고 영국 버클리은행에 가서 대출받는데 성공했고 결국 미포만 현대중공업의 신화를 일으켰어요. 당시로서는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였죠. 지금 저의 스토리는 그것보다는 훨씬 덜 황당해요. 더 구체적인 비젼이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공영의 길이라는 사명감이 끊임없이 솟구쳐요. 저는 저의 사업으로부터 이러한 사명감을 얻을 수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도 행복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비젼의 사나이였어요. 아들인 내가 새로운 비젼이 없이 어떻게 새역사의 길을 열 수 있겠습니까?”

이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사실 나는 이날 그에게 매우 집요하게 ‘150억원’에 관한 질문공세를 폈다. 그는 끝까지 고개를 떨구며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기자로서 공개할만한 어떤 신통한 멧세지도 그로부터 얻어내지 못했다. 나 도올은 이제 정말 기자로서 부적합한 인물인가보다. 솔직히 말해서 정회장 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색하고 비통한 침묵과 미소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웅변해 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합리적 절차에 따라 투명하게만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국민여러분께 심려끼쳐드린 것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보다 신중하고, 절차에 따라, 그리고 투명하게 일하겠습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지나친 집념으로 우리를 자해하고 민족역사의 기회를 유실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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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긍정적 미래를 위해 헌신했던 이에게 큰 위로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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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의 '성공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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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 연구의 보배가 된 '넝마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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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대한매일 기자와 북한문제연구가인 정창현 중앙일보 기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현대사자료실'(한글회관 302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작은 현판이 눈길을 끈다. 그 현판에 양각(陽刻)으로 부조(浮彫)되어 있는 글씨가 바로 '보림재'이다.

그렇다면 '보림재'의 뜻은 무엇일까. 정운현 기자는 그 의미를 '임종국 선생을 보배처럼 모시는 연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보림재(寶林齋)'라는 것이다.(임종국의 한자 성은 '임(任)'이 아니라 '임(林)'이다.)

여기엔 전고(前故)가 있거니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 이와 관련해 시사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전남 강진에는 천하명필로 알려진 추사 김정희가 정약용을 기리며 쓴 현판이 있다고 한다. 추사체로 멋들어지게 쓰여진 '보정산방(寶丁山房)', 이름하여 '정약용을 보배처럼 모시는 산방'이란 뜻이다.(정약용의 한자 성은 '정(鄭)'이 아니라 '정(丁)'이다.)

다산보다 24세 연하였던 추사는 다산을 자신의 학문적 스승으로 섬기며 이런 현판을 남겼다고 한다.

보담재(寶覃齋)는 김정희의 또 하나의 호. 그것은 자신이 또 한 분의 학문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청나라 학자 담계 옹방강을 기린 것이었다. 그런데 또 그 옹방강은 소동파를 보배처럼 모신다는 뜻에서 자신의 서재를 '보소재(寶蘇齋)'라 했다고 한다.

보소재 → 보담재 → 보정산방 → 보림재. 이것이 바로 한 사설 연구실에 '보림재'라는 별칭이 붙게 된 사연이다.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 <친일파>(2권, 3권), <친일파죄상기>, <창씨개명>, <중국-대만 친일파재판사>,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등의 수많은 친일문제연구서를 낸 정운현 기자. 그는 1998년 한국 신문 중 최초로 친일파의 행적을 파헤친 '친일의 군상'을 대한매일에 연재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역시 한국 방송 중 최초로 '라디오 반민특위'를 SBS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기도 했다.

그런 정운현 기자가 연구실 이름까지 이름을 따서 지을 정도로 '보배처럼 모시는 스승' 임종국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실제로 '보림재'라고 쓰여진 현판 바로 위에는 한 초로의 사나이가 각종 서책과 자료가 가득 쌓인 서재를 배경으로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하려는 고(故) 임종국 선생(이하 존칭 생략)이다.

정운현 기자는 이미 1998년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아웃사이더' 11인을 소개한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삼인)에서 임종국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다. 이 기사도 상당 부분 그 글에 힘입어서 쓰여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임종국. 그는 제도권이나 기성 역사학계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해 온 한국현대사 연구의 '금단구역'이었던 친일파 문제를 평생 혼자 구석방에 틀어박혀 낡은 옛 서적과 씨름하며 연구한 독보적 인물이다. 그러나 '임종국'이라는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우선 그의 짧은 이력서를 작성해 봤다.
● 1929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했다. 천도교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상경한 10대 시절, 그는 시인을 꿈꾸던 문학소년이었다. 1952년 고려대 정치학과에 입학할 무렵에는 판사나 검사가 되려고 고시공부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문학으로 '귀향'해 시인 이상(李箱) 연구에 몰두했다.

● 대학 졸업 후 출판사인 신구문화사에 2년 남짓 근무했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직장 생활이었다. 1959년 <문학예술>에 시 '비(碑)'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이후 <사상계> 등에 많은 시를 상재했다.

●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체결된 1965년 그는 친일문제연구가로 변신했다. 이듬해인 1966년 명저 <친일문학론>을 발간한 이후 징용, 징병, 정신대, 독립운동사, 일제침략사 등 전반에 걸쳐 조사, 연구, 집필에 주력하면서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침략사>, <친일논설선집> 등 14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설과 시론을 남겼다.

● 1980년 지병인 천식이 폐기종으로 전이되자 충남 천안으로 귀농했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연구와 집필 활동은 지칠 줄 몰랐고, 그만큼 그의 건강도 악화돼 갔다. 그는 결국 평생의 숙원인 '친일파총서'(전 10권 예정)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후학의 숙제로 남겨놓은 채 환갑의 나이를 갓 넘긴 1989년 11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오늘 우리가 불현듯 임종국을 기억하려는 것은 그의 12주기가 며칠 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임종국은 현재 천안공원묘지 무학지구 철쭉 4단 1번 묘지에 묻혀 있는데,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후학들이 만든 '민족문제연구소'(소장 한상범) 주관으로 11월 11일(일) 바로 그곳에서 추모식 행사가 열린다.(문의 02-969-0226, www.banmin.or.kr)

친일문제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임종국은 원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다. 특히 1950년대 중반인 대학시절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의 작품과 친해졌다. 지도교수이자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의 권유로 문학평론 <이상론>에 이어 1956년 3권 분량의 <이상전집>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임종국은 <이상전집>을 내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뒤, 그것을 토대로 체계적인 비평을 가하는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그가 방대한 자료수집을 통해 엮은 이 책이 출간되면서 평론계에서는 이상의 작품 수보다 더 많은 작가론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면서 발휘된 그의 '철저한 자료 조사와 분류'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일일이 뒤져서 정치, 사회, 문화별로 기사를 색인화하고 있었으며, 그 작업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으로 확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분류되고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자료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문학사회학'의 관점에 입각한 임종국의 1차적 노력이 있었기에 문학계의 이상 연구도 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강준만 교수의 '기록과 평가를 통한 실명비판' 작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발언과 행위를 기록한 1차적 자료에 대한 분류와 평가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기초적 힘이 아닐 수 없다. 임종국이야말로 바로 이 '기록과 평가'의 전통을 수립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임종국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자료쟁이' 후학 중에서 강준만, 박원순, 정운현의 작업을 어깨 너머로 잠깐이나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기록과 평가'를 둘러싼 그들의 곡진한 사연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꼭 한번 소개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임종국의 친일파 연구와 현대사 연구는 일종의 '외도'인 셈이지만 '불륜'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역사'와 조우한 임종국은 역사와의 깊은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임종국이 친일파연구가, 재야사학자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65년에 타결된 굴욕적인 한일회담이었다. 그는 이 일로 "내 인생의 근본이 바뀌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당시 임종국은 <매일신보> 색인을 정리하며 발견한 대한민국 지도층 인사들의 충격적인 친일행각을 정리하면서 한일회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 정부 대표라는 사람이 토해낸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반드시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퍼뜩 20년 전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945년 퇴각하던 한 일본군 상등병이 17세였던 소년 임종국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20년 뒤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고야 말겠다."

그리고 정확히 20년 후 대한민국 정부 대표가 '제2의 이완용'을 운운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임종국은 갑자기 전율을 느꼈다. 그는 나중에 회고문에서 "이거 이대로 보고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런 분위기에선 '제2의 이완용과 송병준과 박춘금'이 얼마든지 생겨날 것이라는 두려움도 엄습했다.

그래서 쓴 것이 바로 <친일문학론>이었다. 원고지 2천매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탈고까지는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임을 염두에 두면 엄청난 속도였다. 그러나 그에겐 이미 '시인 이상(李箱)의 시대(〓일제시대)'를 연구하기 위해 조사해 놓은 1차적 자료가 축적돼 있었다.

그러나 친일문제연구의 길은 영광이 아닌 형극의 길이었다.

당시가 어떤 시대였는가. 무엇보다 먼저 일본육사를 나온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철권통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친일파가 한일회담의 대표로 나섰고,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었고, 독립유공자를 심사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제호 위에 일장기를 달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역사적 단죄를 받기는커녕 사죄 한 마디도 없이 '민족지'를 자처했다.

학계의 내로라 하는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이 숨을 죽이고 있던 시절, 임종국은 친일파 연구라는 이 '금기의 성역'에 겁도 없이 단기필마로 뛰어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제도권 학자들은 자료발굴을 위해 헌책방을 뒤지는 등 고투하는 재야학자들을 '넝마주이'라고 조롱했던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스스로 '넝마주이의 가시밭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한국전쟁 당시) 패주 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한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유신을 불러들였다."
결국 임종국은 제2의 매국, 제3의 매국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1의 매국인 친일문제를 반드시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 임종국의 임종을 지켰던 제자 김대기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년간 독일의 점령 하에 놓인 프랑스는 종전 후 수만명의 부역자들을 처단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제국주의 침략기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민족적 단죄 또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의 해악이 넘쳐흘러 이 땅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으니 실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손을 못댄 성역이 되고만 친일의 배족사를 선생 한 분이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임종국이 1966년 발표한 <친일문학론>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일까.

이 책은 당시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는데, 우선 이광수(香山光郞), 최남선, 김동인(東文仁), 김동환(白山靑樹), 김팔봉(金村八峯), 노천명, 모윤숙, 유진오, 이무영, 이효석, 정비석, 주요한(松村紘一), 채만식, 최정희, 백철, 조용만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명사들이 일제시대 당시 썼던 글, 즉 '천황과 일제를 위해 바친 매국과 매족의 증거물'들이 고스란히 발굴되어 실려 있었다.(괄호 안의 한자는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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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임종국은 자신의 부친인 임문호(천도교 당수, 조선농민사 사장)과 대학 은사인 유진오(고려대 총장, 대한민국 헌법 기초자)마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렸다. 백철, 조용만, 조연현도 당시 부친과 절친한 친구였지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임종국의 역사학자로서의 냉정한 균형감과 공정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임종국은 친일파 연구라는 외로운 작업을 필생의 테마로 잡은 집념의 인물이다.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그의 연구와 집필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었던 것일까. 세상을 뜨기 2년 전 그는 이런 절규를 유언처럼 남겼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뿐인 것이다."
그리고 1989년 11월 12일 0시 40분 임종국은 눈을 감았다.

그의 타계 소식이 알려진 뒤 정부와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선 정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준 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친일전력이 있는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1단으로 짧게 처리하거나 외면해 버렸다.

그것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불의한 권력에 아부하고 친일을 한 것이 드러났고, 더욱이 스스로 그것을 자백하고 인정까지 했던 미당 서정주의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화려한 배웅'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친일행각은 친일행각이고 '문학적 업적'은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는 해괴한 변명을 내세우며 요란스럽게 보도하고 숭모했던 언론, 그런 인물들에게 생전이나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기에 바빴던 정부. 그러나 그들의 숨겨진 과거를 실증적 자료를 통해 밝혀낸 임종국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임종국의 '현재적 의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MBC 시사프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반민특위-승자와 패자>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프로의 마지막 부분에는 경남 통영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직후 반민특위 위원이었던 김철호 씨에 대한 억울한 사연이 나온다. 김 씨는 당시 친일행위를 한 친구 서모 씨를 민족법정에 세우려 했으나 반민특위가 깨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김 씨는 친구 서 씨에게 거꾸로 '빨갱이'로 몰린 채 학살당하고 만다. 그 '반공투사'로 변신한 친일파의 아들은 지금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그동안 '과거완료형' 정도로 취급되었던 친일파 논쟁이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부친의 일제시대 공안검사 전력 논란, 한나라당의 반박성 폭로로 불거진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 논란,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 박정희 기념관 건설반대 논란 등 한국사회의 가장 큰 치부이면서도 철저하게 공백으로 남아있던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각종 변명과 반박 등 '별 이상한 논리'도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소설가 이문열의 '상황론'을 동원한 '친일파 옹호론'이다. 그는 '생계형 친일'과 '출세형 친일'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생계형 친일인 것처럼 몰아가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임종국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친일문제가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으로 눌려오는 것은 그것이 '생존을 위한 친일'이었다기보다, 대부분 부와 지위를 더하기 위한 '자발적 친일'이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1910년 병합되기 전 이미 넘어갈 자들은 다 넘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자."

임종국. 생전에 자료 수집차 일본에 한번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교통비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던 그가 사후에 남긴 것은 집 한 채와 평생 모은 친일파 관련 자료 더미뿐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임종국은 성공한 인생인가, 실패한 인생인가.

물론 세속적 잣대로만 본다면,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메인스트림'과 '승자'가 되어야만 대접받는 세상에서 역사에 대한 신념, 소신, 지조를 가지고 영욕의 현대사를 달려온 임종국에게 우리는 새로운 개념의 성공의 면류관을 선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일궈놓은 옥토에서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와 정운현 기자 같은 후학들이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가 열리는 날. 민족사를 바로 세우려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날. 한반도 방방곡곡이 모두 '보림재'가 되지 않겠는가.

2001/11/09 오후 4:56:28
ⓒ 200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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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명단 일등공신 임종국 선생은 누구인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8월 29일, 친일파 1차 명단 발표와 함께 친일인명사전 탄생의 공신으로 고 임종국 선생을 꼽았다. 임종국은 지난 66년 <친일문학론>을 펴내며 49년 반민특위 이후 중단된 친일청산 활동의 불씨를 되살린 인물이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그의 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 서울에서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 집필에 전념하던 80년대 중반의 임종국 선생.
ⓒ2005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캄캄한 밤길에 초롱불을 들고 걷는 사람이 있었다. 길동무도 없었고 밤길을 헤쳐갈 지팡이 하나도 없었다. 사위는 어둠에 묻혀 있었고 용비어천가만이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지금도 친일파 얘기만 나오면 먹기살기가 어렵고 국민 화합이 중요한데 지난 일을 꺼내 시끄럽게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많다. 1960~70년대에는 지금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 최고 권부는 물론 사법·언론·검찰·학계·문화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친일세력이 주름잡고 있었다. 내선일체, 천황만세, 귀축영미를 부르짖던 자들은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어용지식인들은 일제강점기에 불렀던 용비어천가를 가사만 바꿔 합창하고 있었다.

친일파 문제는 용공 좌경과 동류항으로 묶이고 이단이거나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다. 실제 분위기가 그랬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폭력에 짓밟힌 이래 친일파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친일파 세상에서 친일파를 연구하거나 척결하자는 주장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반공이 국시인 체제에서 '사상불순'은 곧 좌경 빨갱이와 같은 등식이었다.

친일파 연구가 금기이던 시절

임종국, 그가 맨 처음 초롱불을 들었다. 아무도 걷지 않는 밤길을, '어둠의 자식들'이 가로막고 있는 가시밭길을 혼자서 외롭게, 그러나 의롭게 걸었다.

임종국 선생은 1929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천도교 청우당 대표로 친일회의를 주재하고 국방 헌금을 모집했던 친일파 임문호이다. 매국노나 A·B급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지방에서는 행세 깨나 하던 친일인사였던 것 같다.

이같은 사실은 임종국 선생이 본격적인 친일문제를 제기하면서 스스로 밝혔다. 이번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등재 예정자 중에는 그의 선친도 들어있다. 선친의 과오를 참회하는 마음이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1952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1956년 졸업을 했다. 그 무렵 대학 정외과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도 한때 판·검사가 되고자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임종국은 출세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보다 시인 이상 연구에 몰두한 문학청년이었다. 졸업 후 <이상전집>을 펴내고 1959년에는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사상계>에 많은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태평한 세월이었다면 그는 시인으로, 문학인으로 종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상황은 역사의식이 남다른 문학청년을 문학의 영역에 안주하게 만들지 않았다. 일본군·만군 출신들이 중심이 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일본과 저자세 굴욕회담을 벌이고 있었다. 시민·학생들이 반대 투쟁에 나서고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반복하면서 반대를 누르고 굴욕회담을 마무리지었다.

패전 군인이 노려보며 남긴 말 "2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모습(가운데). 박 전 대통령은 왼쪽에 서 있는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와 함께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에 포함돼 있다.


굴욕회담을 지켜보던 임종국은 불현듯 해방 직후 자신의 고향에서 체험한 어떤 일화가 떠올랐다. 당시 17세 소년이던 그는 패전 소식에 주눅이 들어 곧 일본으로 쫓겨나게 될 한 일본군을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소년을 매섭게 노려보던 일본 군인은 소년에게 다가와 "일본의 패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겁에 질린 소년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군인은 "두고 봐라, 20년 후에는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8·15 패전이 확인되면서 군·경찰에 사복을 입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은근히 소문을 퍼뜨렸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라, 일본놈 일어선다"는 유언비어였다. 총독부의 이같은 유언비어는 금방 경향 각지에 소문으로 떠돌았다. 임종국이 만난 군인도 총독부의 지령을 받았을 것이다.

무서운 눈빛의 일본 군인 말대로 정확히 20년 후 체결된 굴욕적 한일협정은 성인이 된 임종국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문학의 이름으로 더이상 음풍농월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로를 바꾸었다. 배족사(背族史)의 친일연구라는 고난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누구의 가르침이 없는 스스로 체득하고 택한 길이었다.

혼자 하는 반민특위 활동

반민특위가 무산된 지 17년이 지난 1966년 '제2반민특위'가 열렸다. '열렸다'는 표현보다는 반민자들의 기소장이 제기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친일문인들에 대한 임종국의 매서운 기소장이었다.

임종국은 이 해 <친일문학론>을 펴냈다. 변호사도, 재판장도, 방청객도 없는 역사의 법정에서 친일문인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였다. 그 때까지 한국 근현대문학의 성좌와 같았던 문인들이 대부분 배족의 친일부역자들이었다는 추상같은 고발은 한국문학사에 일대 경종이었다.

혼자 하는 반민특위 활동은 문학부문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확대되었다. <발가벗고 온 총독>(1970), <정신대 실록>(1981),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 <밤의 일제 침략사>(1984),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1988, 1989) 등 일제 침략사와 친일파 연구에 기본 사료가 되는 저서와 자료집을 잇따라 출간했다.

연구 영역도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종교·예술·군사·언론 등 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다.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관찰이었다. 그가 한번도 송사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충실한 '자료' 때문이었다.

친일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친일관련 저서가 환영받을 리 없다. <친일문학론>이 초판 3천부를 소화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제도권 학자들은 '넝마주이'라 비아냥대고 이단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는 괘념치 아니하고 '재야 사학자'의 타이틀로 친일연구에 몰두했다.

생활고로 서울에서 버티기도 어려웠던 데다가 지병인 천식이 폐기종으로 전이되자 그는 천안 교외에 '요산재'라는 외딴집을 짓고 닭을 키우면서 배족사에 관한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원고료 몇 푼 나오면 헌 책방을 뒤지거나 대학도서관의 자료 복사비에 쏟아부었다. 생활은 궁핍하기 그지없고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었다. 병원에 오래 입원할 처지도 못되었다.

궁핍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배족사 연구는 그칠 줄 몰랐다. 필생의 과업으로 10권 분량의 <친일파 총서>를 기획하였다. 틈틈이 마련한 수천매의 친일파 인명사전 카드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소중한 사료로 보존되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텍스트가 되고 있다. 선생은 이 과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1989년 11월 12일 61세의 생애를 접었다.

그는 철저한 외면과 멸시 속에 떠나갔다

▲ 2003년 11월 9일 열린 고 임종국 선생의 14주기 추모제.
ⓒ2005 박도

임종국의 배족사 연구는 제도권에서 철저히 외면되었다. 그의 글을 실어주는 신문도 잡지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글을 실었던 매체는 더이상 게재가 어렵다는 통고가 따라다녔다. 그가 사망했을 때도 언론은 1단 기사로 처리하거나 아예 취급하지도 않았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해방 전후사의 인식(1)>이 판금된 배경은 이 책에 비중 있게 실린 임종국 선생의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란 논문 때문이었다. 일제 말 친일군상의 대부분은 해방 후 분단과 독재군상으로 탈바꿈하고, 이들과 그 후예들이 칼자루를 잡고 '판금'의 딱지를 붙였던 것이다.

임종국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친일군상들이 활개 치는 암울한 시대에 혼자서 '반민특위 활동'을 전개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가 동토에 뿌린 씨앗은 몇 후학들에게 이어지고 반민족문제연구소에 이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묘판으로 성장하였다.

아무리 같은 시대를 살아도 관념의 깊이나 인식의 부피가 같을 수 없다. 임종국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많은 지식인들이 배족자들을 기리면서 평안하게 살아갈 때 그는 외로운 고난의 길을 택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궁핍과 싸늘한 모멸이 따랐다.

어쩌면 그는 '바보같은 일'만을 하다가 죽었다. 죽은 뒤에도 쉽게 햇볕은 비춰주지 않았다. 배족의 무리에게까지 문화훈장과 각종 상이 추서되는 판에 그에게는 망각의 너울만이 쌓여갔다. 뒤늦게 올 3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선생의 뜻을 되새기려 한다. 그리고 '임종국문화상'을 제정하여 역사정의 실현에 활동하는 인사들을 격려할 계획도 세웠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2년 전 다음과 같은 절규를 유언처럼 남겼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


금관문화훈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사는 유일한 존재다. '세(世)'는 시간, '계(界)'는 공간이다. 누구도 시공을 초월한 존재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주어진 시공에서 어떻게 살다 죽느냐는 것이다. 친일배족자들이 천년 만년을 살 것처럼 행세해도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산자락 빈 터에 묻힘을 면치 못하고, 역사와 후손에게 오명만 유산처럼 남겼다.

반면에 애국자들의 삶은 험난했지만 그들의 성망은 역사에 정사(正史)로 남는다. 임종국의 삶도 이와 같다. 그의 16주기를 앞두고 있다. 정부는 이제 임종국 선생께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여 업적을 기렸으면 한다.

다음은 오늘에 이르러 임종국 사상의 일면이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선생의 유고 한 대목이다.

▲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아일랜드는 300년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 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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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시국미사 성명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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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 성명 전문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마태 7,15)

 

▶대한민국 민주주의 심각한 위기 맞고 있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분노합니다. 주권재민을 힘껏 외치는 시민들의 고뇌를 마음에 품고 오로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하여 사제들이 오늘까지 이렇다 할 의견표명과 행동 없이 침묵 중에 지냈으나 이제 그런 절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그토록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하여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들끓는 국민여론을 제압하기 위하여 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로써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를 탄식하면서 그들의 병든 양심을 교회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꾸짖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조중동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


먼저 보수언론의 폐해를 지적한다. 참여정부 시절 광우병의 위험성을 무섭게 따지고 들다가 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의 절대 안전을 강변하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입니다. 정론직필의 본분을 버리고 이해득실에 따라 말을 뒤집는 언론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것은 만시지탄이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는 현실은 더욱 큰 불행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순진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의 궤적을 잘 알면서도 혹시 경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난 대선의 결과를 빚어낸 것뿐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금번 쇠고기 협상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도 울분을 터뜨릴 일이지만, 높이 받들고 깊이 새겨야 할 천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는 정부의 교만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 많은 부분 속이고 있는 현실 더 큰 불행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드는 맹목적 사대주의도 딱한 일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재앙은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 정신의 가치를 값싸게 여기는 정부의 경박한 물신숭배에서 비롯했음을 지적합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외국산 쇠고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생 공락하는 드높은 자존감입니다.

 

국제적 망신을 일으킨 졸속협상이나마 정부의 주장대로 이에 복종하는 것이 한미 FTA 체결 조건에 유리하고, 그래서 자유무역이 혹시 경제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억측이 설령 옳다고 가정해도 그 결과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게 교회의 판단입니다.

 

 결국 정부는 불행한 미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공권력을 악용하여 국민의 통곡과 신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경찰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 꺼지지 않도록 지키겠다


우리는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5)는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까지 촛불을 지켰던 민심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청정한 수도자들과 전국의 모든 교우들과 함께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드리고자 합니다.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이런 모진 마음 때문에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대통령에게 호소합니다.

 

1. 국민은 너그럽습니다. 대통령은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사죄를 청하는 뜻으로 장관고시를 폐하고 쇠고기 전면재협상을 선언하길 바랍니다. .

 

2.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대통령은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길 바랍니다.

 

3. 국민은 현명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입니다. 일부 언론이 쇠고기 문제를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핵심을 왜곡하지 말아야합니다.

 

4. 과잉 폭력진압을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시위 중 연행된 사람들과 대책회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십시오. 그리하여 존엄을 바라는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길 바랍니다.

 

5. 국민 여러분에게도 호소합니다. 촛불의 평화의 상징이며 기도의 무기이며 비폭력의 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의 정신에 철저해야만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2008년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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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 미래를 보는 혜안으로 악마의 시험에 중심을 잡아주고 바른 길을 함께 실천하려는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종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의 모든 개념 위에서 진정한 인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들에게서 참된 지성인의 모습과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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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oldred.tistory.com oldred 2008.07.01 10:2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시국미사를 함께 드리며 생전 처음으로 카톨릭 교인임이 뜨겁게 자랑스러웠답니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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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이해인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된다. 옷깃을 한번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것은
불필요한 소모적인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인간적인 필요에서
 접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위에 몇몇 사람들에 불과하고
그들만이라도
진실한 인연을 맺어 놓으면
좋은 삶을 마련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댓가로 받는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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