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의 '성공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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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 연구의 보배가 된 '넝마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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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대한매일 기자와 북한문제연구가인 정창현 중앙일보 기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현대사자료실'(한글회관 302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작은 현판이 눈길을 끈다. 그 현판에 양각(陽刻)으로 부조(浮彫)되어 있는 글씨가 바로 '보림재'이다.

그렇다면 '보림재'의 뜻은 무엇일까. 정운현 기자는 그 의미를 '임종국 선생을 보배처럼 모시는 연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보림재(寶林齋)'라는 것이다.(임종국의 한자 성은 '임(任)'이 아니라 '임(林)'이다.)

여기엔 전고(前故)가 있거니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 이와 관련해 시사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전남 강진에는 천하명필로 알려진 추사 김정희가 정약용을 기리며 쓴 현판이 있다고 한다. 추사체로 멋들어지게 쓰여진 '보정산방(寶丁山房)', 이름하여 '정약용을 보배처럼 모시는 산방'이란 뜻이다.(정약용의 한자 성은 '정(鄭)'이 아니라 '정(丁)'이다.)

다산보다 24세 연하였던 추사는 다산을 자신의 학문적 스승으로 섬기며 이런 현판을 남겼다고 한다.

보담재(寶覃齋)는 김정희의 또 하나의 호. 그것은 자신이 또 한 분의 학문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청나라 학자 담계 옹방강을 기린 것이었다. 그런데 또 그 옹방강은 소동파를 보배처럼 모신다는 뜻에서 자신의 서재를 '보소재(寶蘇齋)'라 했다고 한다.

보소재 → 보담재 → 보정산방 → 보림재. 이것이 바로 한 사설 연구실에 '보림재'라는 별칭이 붙게 된 사연이다.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 <친일파>(2권, 3권), <친일파죄상기>, <창씨개명>, <중국-대만 친일파재판사>,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등의 수많은 친일문제연구서를 낸 정운현 기자. 그는 1998년 한국 신문 중 최초로 친일파의 행적을 파헤친 '친일의 군상'을 대한매일에 연재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역시 한국 방송 중 최초로 '라디오 반민특위'를 SBS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기도 했다.

그런 정운현 기자가 연구실 이름까지 이름을 따서 지을 정도로 '보배처럼 모시는 스승' 임종국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실제로 '보림재'라고 쓰여진 현판 바로 위에는 한 초로의 사나이가 각종 서책과 자료가 가득 쌓인 서재를 배경으로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하려는 고(故) 임종국 선생(이하 존칭 생략)이다.

정운현 기자는 이미 1998년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아웃사이더' 11인을 소개한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삼인)에서 임종국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다. 이 기사도 상당 부분 그 글에 힘입어서 쓰여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임종국. 그는 제도권이나 기성 역사학계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해 온 한국현대사 연구의 '금단구역'이었던 친일파 문제를 평생 혼자 구석방에 틀어박혀 낡은 옛 서적과 씨름하며 연구한 독보적 인물이다. 그러나 '임종국'이라는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우선 그의 짧은 이력서를 작성해 봤다.
● 1929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했다. 천도교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상경한 10대 시절, 그는 시인을 꿈꾸던 문학소년이었다. 1952년 고려대 정치학과에 입학할 무렵에는 판사나 검사가 되려고 고시공부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문학으로 '귀향'해 시인 이상(李箱) 연구에 몰두했다.

● 대학 졸업 후 출판사인 신구문화사에 2년 남짓 근무했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직장 생활이었다. 1959년 <문학예술>에 시 '비(碑)'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이후 <사상계> 등에 많은 시를 상재했다.

●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체결된 1965년 그는 친일문제연구가로 변신했다. 이듬해인 1966년 명저 <친일문학론>을 발간한 이후 징용, 징병, 정신대, 독립운동사, 일제침략사 등 전반에 걸쳐 조사, 연구, 집필에 주력하면서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침략사>, <친일논설선집> 등 14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설과 시론을 남겼다.

● 1980년 지병인 천식이 폐기종으로 전이되자 충남 천안으로 귀농했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연구와 집필 활동은 지칠 줄 몰랐고, 그만큼 그의 건강도 악화돼 갔다. 그는 결국 평생의 숙원인 '친일파총서'(전 10권 예정)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후학의 숙제로 남겨놓은 채 환갑의 나이를 갓 넘긴 1989년 11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오늘 우리가 불현듯 임종국을 기억하려는 것은 그의 12주기가 며칠 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임종국은 현재 천안공원묘지 무학지구 철쭉 4단 1번 묘지에 묻혀 있는데,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후학들이 만든 '민족문제연구소'(소장 한상범) 주관으로 11월 11일(일) 바로 그곳에서 추모식 행사가 열린다.(문의 02-969-0226, www.banmin.or.kr)

친일문제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임종국은 원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다. 특히 1950년대 중반인 대학시절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의 작품과 친해졌다. 지도교수이자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의 권유로 문학평론 <이상론>에 이어 1956년 3권 분량의 <이상전집>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임종국은 <이상전집>을 내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뒤, 그것을 토대로 체계적인 비평을 가하는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그가 방대한 자료수집을 통해 엮은 이 책이 출간되면서 평론계에서는 이상의 작품 수보다 더 많은 작가론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면서 발휘된 그의 '철저한 자료 조사와 분류'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일일이 뒤져서 정치, 사회, 문화별로 기사를 색인화하고 있었으며, 그 작업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으로 확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분류되고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자료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문학사회학'의 관점에 입각한 임종국의 1차적 노력이 있었기에 문학계의 이상 연구도 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강준만 교수의 '기록과 평가를 통한 실명비판' 작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발언과 행위를 기록한 1차적 자료에 대한 분류와 평가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기초적 힘이 아닐 수 없다. 임종국이야말로 바로 이 '기록과 평가'의 전통을 수립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임종국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자료쟁이' 후학 중에서 강준만, 박원순, 정운현의 작업을 어깨 너머로 잠깐이나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기록과 평가'를 둘러싼 그들의 곡진한 사연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꼭 한번 소개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임종국의 친일파 연구와 현대사 연구는 일종의 '외도'인 셈이지만 '불륜'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역사'와 조우한 임종국은 역사와의 깊은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임종국이 친일파연구가, 재야사학자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65년에 타결된 굴욕적인 한일회담이었다. 그는 이 일로 "내 인생의 근본이 바뀌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당시 임종국은 <매일신보> 색인을 정리하며 발견한 대한민국 지도층 인사들의 충격적인 친일행각을 정리하면서 한일회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 정부 대표라는 사람이 토해낸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반드시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퍼뜩 20년 전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945년 퇴각하던 한 일본군 상등병이 17세였던 소년 임종국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20년 뒤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고야 말겠다."

그리고 정확히 20년 후 대한민국 정부 대표가 '제2의 이완용'을 운운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임종국은 갑자기 전율을 느꼈다. 그는 나중에 회고문에서 "이거 이대로 보고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런 분위기에선 '제2의 이완용과 송병준과 박춘금'이 얼마든지 생겨날 것이라는 두려움도 엄습했다.

그래서 쓴 것이 바로 <친일문학론>이었다. 원고지 2천매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탈고까지는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임을 염두에 두면 엄청난 속도였다. 그러나 그에겐 이미 '시인 이상(李箱)의 시대(〓일제시대)'를 연구하기 위해 조사해 놓은 1차적 자료가 축적돼 있었다.

그러나 친일문제연구의 길은 영광이 아닌 형극의 길이었다.

당시가 어떤 시대였는가. 무엇보다 먼저 일본육사를 나온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철권통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친일파가 한일회담의 대표로 나섰고,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었고, 독립유공자를 심사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제호 위에 일장기를 달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역사적 단죄를 받기는커녕 사죄 한 마디도 없이 '민족지'를 자처했다.

학계의 내로라 하는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이 숨을 죽이고 있던 시절, 임종국은 친일파 연구라는 이 '금기의 성역'에 겁도 없이 단기필마로 뛰어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제도권 학자들은 자료발굴을 위해 헌책방을 뒤지는 등 고투하는 재야학자들을 '넝마주이'라고 조롱했던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스스로 '넝마주이의 가시밭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한국전쟁 당시) 패주 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한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유신을 불러들였다."
결국 임종국은 제2의 매국, 제3의 매국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1의 매국인 친일문제를 반드시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 임종국의 임종을 지켰던 제자 김대기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년간 독일의 점령 하에 놓인 프랑스는 종전 후 수만명의 부역자들을 처단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제국주의 침략기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민족적 단죄 또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의 해악이 넘쳐흘러 이 땅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으니 실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손을 못댄 성역이 되고만 친일의 배족사를 선생 한 분이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임종국이 1966년 발표한 <친일문학론>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일까.

이 책은 당시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는데, 우선 이광수(香山光郞), 최남선, 김동인(東文仁), 김동환(白山靑樹), 김팔봉(金村八峯), 노천명, 모윤숙, 유진오, 이무영, 이효석, 정비석, 주요한(松村紘一), 채만식, 최정희, 백철, 조용만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명사들이 일제시대 당시 썼던 글, 즉 '천황과 일제를 위해 바친 매국과 매족의 증거물'들이 고스란히 발굴되어 실려 있었다.(괄호 안의 한자는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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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임종국은 자신의 부친인 임문호(천도교 당수, 조선농민사 사장)과 대학 은사인 유진오(고려대 총장, 대한민국 헌법 기초자)마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렸다. 백철, 조용만, 조연현도 당시 부친과 절친한 친구였지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임종국의 역사학자로서의 냉정한 균형감과 공정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임종국은 친일파 연구라는 외로운 작업을 필생의 테마로 잡은 집념의 인물이다.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그의 연구와 집필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었던 것일까. 세상을 뜨기 2년 전 그는 이런 절규를 유언처럼 남겼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뿐인 것이다."
그리고 1989년 11월 12일 0시 40분 임종국은 눈을 감았다.

그의 타계 소식이 알려진 뒤 정부와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선 정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준 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친일전력이 있는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1단으로 짧게 처리하거나 외면해 버렸다.

그것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불의한 권력에 아부하고 친일을 한 것이 드러났고, 더욱이 스스로 그것을 자백하고 인정까지 했던 미당 서정주의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화려한 배웅'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친일행각은 친일행각이고 '문학적 업적'은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는 해괴한 변명을 내세우며 요란스럽게 보도하고 숭모했던 언론, 그런 인물들에게 생전이나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기에 바빴던 정부. 그러나 그들의 숨겨진 과거를 실증적 자료를 통해 밝혀낸 임종국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임종국의 '현재적 의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MBC 시사프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반민특위-승자와 패자>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프로의 마지막 부분에는 경남 통영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직후 반민특위 위원이었던 김철호 씨에 대한 억울한 사연이 나온다. 김 씨는 당시 친일행위를 한 친구 서모 씨를 민족법정에 세우려 했으나 반민특위가 깨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김 씨는 친구 서 씨에게 거꾸로 '빨갱이'로 몰린 채 학살당하고 만다. 그 '반공투사'로 변신한 친일파의 아들은 지금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그동안 '과거완료형' 정도로 취급되었던 친일파 논쟁이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부친의 일제시대 공안검사 전력 논란, 한나라당의 반박성 폭로로 불거진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 논란, <조선일보> 친일행각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 박정희 기념관 건설반대 논란 등 한국사회의 가장 큰 치부이면서도 철저하게 공백으로 남아있던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각종 변명과 반박 등 '별 이상한 논리'도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소설가 이문열의 '상황론'을 동원한 '친일파 옹호론'이다. 그는 '생계형 친일'과 '출세형 친일'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생계형 친일인 것처럼 몰아가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임종국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친일문제가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으로 눌려오는 것은 그것이 '생존을 위한 친일'이었다기보다, 대부분 부와 지위를 더하기 위한 '자발적 친일'이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1910년 병합되기 전 이미 넘어갈 자들은 다 넘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자."

임종국. 생전에 자료 수집차 일본에 한번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교통비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던 그가 사후에 남긴 것은 집 한 채와 평생 모은 친일파 관련 자료 더미뿐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임종국은 성공한 인생인가, 실패한 인생인가.

물론 세속적 잣대로만 본다면,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메인스트림'과 '승자'가 되어야만 대접받는 세상에서 역사에 대한 신념, 소신, 지조를 가지고 영욕의 현대사를 달려온 임종국에게 우리는 새로운 개념의 성공의 면류관을 선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일궈놓은 옥토에서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와 정운현 기자 같은 후학들이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가 열리는 날. 민족사를 바로 세우려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날. 한반도 방방곡곡이 모두 '보림재'가 되지 않겠는가.

2001/11/09 오후 4:56:28
ⓒ 200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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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명단 일등공신 임종국 선생은 누구인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8월 29일, 친일파 1차 명단 발표와 함께 친일인명사전 탄생의 공신으로 고 임종국 선생을 꼽았다. 임종국은 지난 66년 <친일문학론>을 펴내며 49년 반민특위 이후 중단된 친일청산 활동의 불씨를 되살린 인물이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그의 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 서울에서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 집필에 전념하던 80년대 중반의 임종국 선생.
ⓒ2005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캄캄한 밤길에 초롱불을 들고 걷는 사람이 있었다. 길동무도 없었고 밤길을 헤쳐갈 지팡이 하나도 없었다. 사위는 어둠에 묻혀 있었고 용비어천가만이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지금도 친일파 얘기만 나오면 먹기살기가 어렵고 국민 화합이 중요한데 지난 일을 꺼내 시끄럽게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많다. 1960~70년대에는 지금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 최고 권부는 물론 사법·언론·검찰·학계·문화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친일세력이 주름잡고 있었다. 내선일체, 천황만세, 귀축영미를 부르짖던 자들은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어용지식인들은 일제강점기에 불렀던 용비어천가를 가사만 바꿔 합창하고 있었다.

친일파 문제는 용공 좌경과 동류항으로 묶이고 이단이거나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다. 실제 분위기가 그랬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폭력에 짓밟힌 이래 친일파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친일파 세상에서 친일파를 연구하거나 척결하자는 주장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반공이 국시인 체제에서 '사상불순'은 곧 좌경 빨갱이와 같은 등식이었다.

친일파 연구가 금기이던 시절

임종국, 그가 맨 처음 초롱불을 들었다. 아무도 걷지 않는 밤길을, '어둠의 자식들'이 가로막고 있는 가시밭길을 혼자서 외롭게, 그러나 의롭게 걸었다.

임종국 선생은 1929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천도교 청우당 대표로 친일회의를 주재하고 국방 헌금을 모집했던 친일파 임문호이다. 매국노나 A·B급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지방에서는 행세 깨나 하던 친일인사였던 것 같다.

이같은 사실은 임종국 선생이 본격적인 친일문제를 제기하면서 스스로 밝혔다. 이번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등재 예정자 중에는 그의 선친도 들어있다. 선친의 과오를 참회하는 마음이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1952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1956년 졸업을 했다. 그 무렵 대학 정외과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도 한때 판·검사가 되고자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임종국은 출세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보다 시인 이상 연구에 몰두한 문학청년이었다. 졸업 후 <이상전집>을 펴내고 1959년에는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사상계>에 많은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태평한 세월이었다면 그는 시인으로, 문학인으로 종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상황은 역사의식이 남다른 문학청년을 문학의 영역에 안주하게 만들지 않았다. 일본군·만군 출신들이 중심이 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일본과 저자세 굴욕회담을 벌이고 있었다. 시민·학생들이 반대 투쟁에 나서고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반복하면서 반대를 누르고 굴욕회담을 마무리지었다.

패전 군인이 노려보며 남긴 말 "2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모습(가운데). 박 전 대통령은 왼쪽에 서 있는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와 함께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에 포함돼 있다.


굴욕회담을 지켜보던 임종국은 불현듯 해방 직후 자신의 고향에서 체험한 어떤 일화가 떠올랐다. 당시 17세 소년이던 그는 패전 소식에 주눅이 들어 곧 일본으로 쫓겨나게 될 한 일본군을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소년을 매섭게 노려보던 일본 군인은 소년에게 다가와 "일본의 패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겁에 질린 소년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군인은 "두고 봐라, 20년 후에는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8·15 패전이 확인되면서 군·경찰에 사복을 입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은근히 소문을 퍼뜨렸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라, 일본놈 일어선다"는 유언비어였다. 총독부의 이같은 유언비어는 금방 경향 각지에 소문으로 떠돌았다. 임종국이 만난 군인도 총독부의 지령을 받았을 것이다.

무서운 눈빛의 일본 군인 말대로 정확히 20년 후 체결된 굴욕적 한일협정은 성인이 된 임종국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문학의 이름으로 더이상 음풍농월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로를 바꾸었다. 배족사(背族史)의 친일연구라는 고난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누구의 가르침이 없는 스스로 체득하고 택한 길이었다.

혼자 하는 반민특위 활동

반민특위가 무산된 지 17년이 지난 1966년 '제2반민특위'가 열렸다. '열렸다'는 표현보다는 반민자들의 기소장이 제기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친일문인들에 대한 임종국의 매서운 기소장이었다.

임종국은 이 해 <친일문학론>을 펴냈다. 변호사도, 재판장도, 방청객도 없는 역사의 법정에서 친일문인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였다. 그 때까지 한국 근현대문학의 성좌와 같았던 문인들이 대부분 배족의 친일부역자들이었다는 추상같은 고발은 한국문학사에 일대 경종이었다.

혼자 하는 반민특위 활동은 문학부문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확대되었다. <발가벗고 온 총독>(1970), <정신대 실록>(1981),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 <밤의 일제 침략사>(1984),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1988, 1989) 등 일제 침략사와 친일파 연구에 기본 사료가 되는 저서와 자료집을 잇따라 출간했다.

연구 영역도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종교·예술·군사·언론 등 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다.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관찰이었다. 그가 한번도 송사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충실한 '자료' 때문이었다.

친일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친일관련 저서가 환영받을 리 없다. <친일문학론>이 초판 3천부를 소화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제도권 학자들은 '넝마주이'라 비아냥대고 이단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는 괘념치 아니하고 '재야 사학자'의 타이틀로 친일연구에 몰두했다.

생활고로 서울에서 버티기도 어려웠던 데다가 지병인 천식이 폐기종으로 전이되자 그는 천안 교외에 '요산재'라는 외딴집을 짓고 닭을 키우면서 배족사에 관한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원고료 몇 푼 나오면 헌 책방을 뒤지거나 대학도서관의 자료 복사비에 쏟아부었다. 생활은 궁핍하기 그지없고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었다. 병원에 오래 입원할 처지도 못되었다.

궁핍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배족사 연구는 그칠 줄 몰랐다. 필생의 과업으로 10권 분량의 <친일파 총서>를 기획하였다. 틈틈이 마련한 수천매의 친일파 인명사전 카드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소중한 사료로 보존되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텍스트가 되고 있다. 선생은 이 과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1989년 11월 12일 61세의 생애를 접었다.

그는 철저한 외면과 멸시 속에 떠나갔다

▲ 2003년 11월 9일 열린 고 임종국 선생의 14주기 추모제.
ⓒ2005 박도

임종국의 배족사 연구는 제도권에서 철저히 외면되었다. 그의 글을 실어주는 신문도 잡지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글을 실었던 매체는 더이상 게재가 어렵다는 통고가 따라다녔다. 그가 사망했을 때도 언론은 1단 기사로 처리하거나 아예 취급하지도 않았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해방 전후사의 인식(1)>이 판금된 배경은 이 책에 비중 있게 실린 임종국 선생의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란 논문 때문이었다. 일제 말 친일군상의 대부분은 해방 후 분단과 독재군상으로 탈바꿈하고, 이들과 그 후예들이 칼자루를 잡고 '판금'의 딱지를 붙였던 것이다.

임종국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친일군상들이 활개 치는 암울한 시대에 혼자서 '반민특위 활동'을 전개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가 동토에 뿌린 씨앗은 몇 후학들에게 이어지고 반민족문제연구소에 이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묘판으로 성장하였다.

아무리 같은 시대를 살아도 관념의 깊이나 인식의 부피가 같을 수 없다. 임종국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많은 지식인들이 배족자들을 기리면서 평안하게 살아갈 때 그는 외로운 고난의 길을 택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궁핍과 싸늘한 모멸이 따랐다.

어쩌면 그는 '바보같은 일'만을 하다가 죽었다. 죽은 뒤에도 쉽게 햇볕은 비춰주지 않았다. 배족의 무리에게까지 문화훈장과 각종 상이 추서되는 판에 그에게는 망각의 너울만이 쌓여갔다. 뒤늦게 올 3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선생의 뜻을 되새기려 한다. 그리고 '임종국문화상'을 제정하여 역사정의 실현에 활동하는 인사들을 격려할 계획도 세웠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2년 전 다음과 같은 절규를 유언처럼 남겼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


금관문화훈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사는 유일한 존재다. '세(世)'는 시간, '계(界)'는 공간이다. 누구도 시공을 초월한 존재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주어진 시공에서 어떻게 살다 죽느냐는 것이다. 친일배족자들이 천년 만년을 살 것처럼 행세해도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산자락 빈 터에 묻힘을 면치 못하고, 역사와 후손에게 오명만 유산처럼 남겼다.

반면에 애국자들의 삶은 험난했지만 그들의 성망은 역사에 정사(正史)로 남는다. 임종국의 삶도 이와 같다. 그의 16주기를 앞두고 있다. 정부는 이제 임종국 선생께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여 업적을 기렸으면 한다.

다음은 오늘에 이르러 임종국 사상의 일면이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선생의 유고 한 대목이다.

▲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아일랜드는 300년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 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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